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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선과 자연 2> '흡선치유는 자연감각적 지혜의 호소에 대답한다'
<흡선과 자연 2> 자연적인 감각은 느낌, 느낌 자체가 중요하고 실제적
 
서울흡선동아리<흡선과 자연> 기사입력 2013/10/14 [15:25] 조회 7637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은 학문적 개념으로 감싸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이원성은 시효를 잃은 선입관으로서 우리는 흔쾌히 그것을 조소할 수 있다.  낙원에서의 삶은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직선의 진행과 같지 않았다. 그것은 모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아는 것들에서 맴돌았다. 낙원에서의 삶이 갖는 단조로움은 지루함이 아니고 행복이었다. 인간이 시골의 자연 속에서 가축들에 둘러싸여 계절과 계절의 변화 속에 보호받고 살았던 때만 하여도, -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민음사.
 
인간은 큰 아름다움인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의 균형 잡힌 삶으로부터 고립되었습니다.
자연과 동떨어진 사고와 형태가 삶의 유일한 방식은 아닙니다. 생명의 자연스러운 기쁨과 지혜를 잃어버린 이유는, 그것을 무시하도록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도 서로에게서 발견되는 자연적 지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충만함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자연으로 다가가고, 함께 공감을 하고, 하나가 되는 시도 행위 자체가 인간 삶의 탐사가 아닐까요.
 
근대의 자연개발 정책과 이성중심주의가 근본적으로 재검토 되고 있고, 삶의 근원적인 터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현실적인 상황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삶의 초기부터 사회는, 너와 나의 ‘관계’를 억압합니다.
밖으로부터 주입되는 메시지는 ‘경쟁을 해서 이기는’ 것이며, 그 태도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배우며 자란 부모들은 아이를 따뜻한 품에 안아주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공부 잘해서 돈 많이 벌게 할까’는 생각만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 감각적인 관계의 현실은 그보다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거나 생략됩니다. 인간은 점점 둔감해져서 느낌으로부터 멀어져 감각적 표현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각각의 감각은 생명을 알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생생하고 분명한 방법이며, 어떤 형태로든 자연에 존재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무력하게 하는 외부의 영향에 눌리지 않고 직접 감각으로 경험하면, 각각의 감각이 다른 감각들과는 그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의 자연 감각은 하나의 느낌을 나타내며, 느낌 자체는 사물만큼이나 중요하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흡선치유법이 ‘종합검사법이다’, ‘종합치료법이다’, ‘전인류 공유의 자가치료법이다’ 라고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우리 몸이 의료제도 등 외부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현실과,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재검토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의 한 예는 <산책>입니다. 산책은 단순한 다리운동이 아니라, 자연감각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연 속에서’의 매혹적인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면, 결핍이나 중독이나 광기가 상대적으로 덜한 인간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 생명공동체의 통합성으로부터 과도하게 분리된 서구 문명이 가한 상처는, 자연과 교감하는 삶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합니다. 그 필요란 서로의 지원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내면의 지혜의 호소입니다.
 
흡선치유법은 그 호소에 스스로 답하려는 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편한 상태와 불안정한 욕구는 인간을 자극해 자연적 끌림의 관계방식에 다시 연결되고픈 갈구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감각들은 이렇게 필수적인 동기를 유발합니다. 고통은 인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현명하고 우호적인 공헌입니다. 자연스럽게 흐름을 조절해줍니다. 그리하여 고통은, 광대한 경험의 장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필요한 축복이자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축제의 마당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너와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미 친밀감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자연과 교감을 하는 내 몸의 목소리이며 흡선치유법의 목소리입니다.
 
흡선치유법의 과정에서 중시하는 산책을 통하여 자연의 감수성이 충족된 순환적 기억을 다시 갖게 되면 좋겠습니다. 유기체에서 유기체로, 자연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구성해 상호 연결하는 힘을 갖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몸으로 되살려내면 좋겠습니다. 자연감각을 통해 내면의 자연을 품은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완전히 알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연감각을 발명해내지 않았고, 외부의 주입을 통해 그것들을 알 수조차 없기 때문에 이 감각과 감성들은 신비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그것은 예술이나 과학 분야에서 모두 진실이다.” 김우창은 그것을 ‘기이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을 한자말로 인간이라 부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나’나 ‘너’안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서, 너와 나 사이에서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는 뜻일 겁니다. 인간인 우리의 혼돈 상태를 보면, 그 사고방식이 무언가 결핍되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자연의 삶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다음, 인간은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워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거짓된 사회적 가치’를 벗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사회적 관련 속에서 새로 드러나는 잠재력을 살려 내어 자기를 완성하는 것을 뜻한다. - 김우창,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돌베개.
 
인간은 존재론적 의미만이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자연으로 열려있는 존재입니다.
개인의 삶을 살펴보더라도, 인간은 자연과 접속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에서의 경험은 온도, 색깔, 촉감과 같이 분명하고도 다양한 감각들로 이루어집니다. 수렵사회와 군집사회에서도 그 이전에도 이미 사람과 환경에 저절로 끌리는 자연스러운 감각을 따르는 것이 균형 있는 생존의 열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연적 끌림은 인간과 자연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줍니다. 자연스럽게 느낍니다. 그것이 인간 내면에 살아서 존재하는 사랑입니다. 감각적인 끌림이 자연과 인간을 서로 이끌고 환영하며 감정적으로 격려합니다. 그것은 감각-느낌의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도록 해줍니다.
 
흡선을 통해 치유를 꾀한다는 것은, 삶이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한 탐사이며 자연적 사고방식과 관계감각을 의식적으로 불러내는 행위로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다양성과 평화로움, 온전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인간도 그 사고과정을 공유하는 주체로서의 시도이자 탐색인 것입니다. 삶을 지속시키는 자연스러운 온전함, 아름다움, 지성의 작용을 일깨우려는 갈구 상태의 표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산업 사회는 다르게 생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변과 내면의 자연을 정복하고 분리시키도록 합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외부 가치의 주입이 만들어낸 생각의 이야기 속에 살며, 자연과 전쟁을 하도록 조장하는 과정을 가르칩니다.
자연을 정복하고 내면의 지성을 부수고 희생시켰더라도 자연에는 스스로 재생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어 파괴되면 온전함은 사라지고 맙니다. 온전함이 희생되어 나타나는 고통의 재앙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자연과 충분히 접속함으로써 사고를 순환하고 이 세계의 온전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감각을 통하여 자연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연결의 형태를 그 친밀감각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친밀감은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힘입니다. ‘돌봄(caring)의 윤리입니다. 이는 ’사랑의 지각(a loving eye)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성적 원리’(feminine principle)인 사물과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으로 간주되는 ‘영성’의 원리입니다.
 
‘내적 전경’과 ‘외적 전경’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자아와 타자의 구분을 없애는 원리입니다.
즉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연속성, 생명의 신성함을 그 본질로 하고 있는 영성의 원리는 모든 생명체의 창조와 재생 그리고 순환구조 속에서 생래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력한 생산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영성’의 원리는 부조리하고 불건전한 이원론적 대립이 만들어낸 각종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신념이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흡선치유법도 그 신념의 다른 이름이 되기를 바라며 또한 대안의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흡선치유법의 이현기씨는 한 강의에서 말했습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질병의 역사는 그것이 택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다른 길로 접어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질병을 내가 스스로 고치는 것은 나 자신의 무한한 자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자유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어요. 자유를 잃은 거죠. 질병에 다가가는 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많은 형식상의 가능성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수백억 년 이상 자연의 다중감각적 지성은 생명의 다양성을 증진시켜왔고, 그 원동력은 ‘서로돕는 관계망’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제 몸과 분리되어 겪는 공허와 불안의 간극을 매우는 길은 일상생활의 회복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합니다.
 
일상생활의 회복이란 무엇일까요. 내 몸의 자연감각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서로 연결되는 친밀감의 중요성에 대해 되짚어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알아차림으로 자연스럽게 상호교감이 만들어내는 풍성한 관계. 다음에는 공동체적·협동적인 대안이 창조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흡선치유법을 통해 공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공부해보려 합니다. ^^
 
▲     ©흡선치유닷컴
 
                                                             - 서울 흡선연구동아리 <흡선과 자연>


 
 
기사입력: 2013/10/14 [15:25]  최종편집: ⓒ 흡선치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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